The Slience of Sirens
8.18(Fri)-8.27 (Sun) 11:00-20:00
Interactive sound installation | 1F GalleryM30
Organization/Directing: Eunhae Grace Cho, Sua Kim
Sound and Technology Collaboration: Guinneissik
Technical Assistance Cooperation: SANGHEE
Can we hear what cannot be conveyed through language?
The Silence of the Sirens focuses on the aspects that are not immediatelv audible or hidden in the process of language communication through ambiance. Ambiance refers to sounds with various spectra, but sometimes they may go unnoticed or be perceived as mere noise. In this exhibition, the spectators are presented with an environment where they seemingly hear no sound, but there is definitely something present. They are encouraged to pay attention to the subtle differences in ambiance that possess distinct qualities. The implemented ambiance in the space triggers the movement of the spectators, prompting them to actively explore those subtle differences.
The title of the exhibition is derived from Franz Kafka's short story "The Silence of the Sirens." The silence of the sirens is a more powerful weapon than their song. This is because unlike a single song (language), the direction of listening and understanding is not fixed with silence.
The exhibition hopes that the spectators within the silence can each hear and imagine something different beyond the song (language).
밀랍과 사슬
김뉘연 (작가)
소리는 공간이다. 1951년 존 케이지가 반향(反響, 소리가 어떤 장애물에 부딪쳐서 반사하여 다시 들리는 현상)을 차단했기에 공간을 가늠하기 어려워지는 무반향실에서 자신의 신체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듯이, 인체라는 공간으로 태어난 인간은 소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심지어 청력을 상실한 경우라 하더라도 자체로 소리를 가진 공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침묵에 소리가 있다는 사실은 침묵이 공간임을 드러낸다. 1952년 존 케이지가 작품 〈4분 33초〉를 통해 드러냈듯이, 침묵이라는 공간 안에서 움직임의 산물인 소리가 움직인다. 말 없음은 말과 말 사이의 소리를 들려준다. 말과 말 사이에서 움직이는 소리는 침묵의 공간을 누비며 자신을 증명해 나간다. 이러한 공간은 말이 되기 이전의 시간이기도 하다—‘4분 33초’라는 제목이 증명하듯, 소리는 시간이다.
소리라는 시공간은 움직임을 받아들인다. 〈4분 33초〉의 “모든 악장은 합창과 악기가 침묵할 것을 지시하는 ‘쉼(tacet)’이라고 하는 음악의 지시문으로 수행된다”.[1] 공연의 연주자들은 ‘쉼’을 수행할 것을 지시받는다. 그러나 공연의 주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연주의 쉼이 시작되면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쉼 없이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던 이것들은 통상적인 주요함이 지시를 통해 의도적으로 제거되면서 비로소 소리로 드러나게 된다. 상대적으로 덜 들렸을 뿐인 이 소리들은 움직임의 과정에 있다.
전시 《사이렌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irens)》은 이 사이의 소리에 집중하는 과정의 공간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의 주요한 도구인 언어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언어를 제거했을 때, 남겨진 침묵은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 미세하고 다양한 움직임이 반영된 소리들은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이 공백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 공백 아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서 의사소통은 다른 방향을 향할 수 있다. 더 많은 소리, 언어가 되지 못하고 미끄러진. 더 많은 소리,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지되지 못했던 소리들이 전면에 배치되면서 함께 드러나게 되는 현상이 있다. 어긋나고, 지연되고, 지체되고, 소외되고, 외면받고, 거부당하고, 누락되고, 은폐되기에 이르기까지 뒤로 미루어졌던 것들이 듣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더 이상 미루어지지 않게 된다. 앞선 문장은 이를 결국 언어로 한정해 표현하고 있지만, 이 시공간의 소리는 글과 말을 넘어서 있다. 오래 함께해 온 소리를 낯선 입체로 마주하게 되고 이를 스스로의 움직임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면서 각자의 인지 감각이 깨어난다. 새롭게 발견된 시공간에서 깨어난 인지 감각은 들리는 소리의 본모습과 무관히 또 다른 시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인간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의 여기에서 미지의 시공간을 구현하며 그곳으로 이끄는 침묵의 소리,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사이렌의 침묵」에서 그리스신화 속 바다의 요정 사이렌이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몸을 돛대에 사슬로 묶어 무장한 선상의 오디세우스에게 아름다운 노래 대신 내민 카드다. 스스로 움직임을 결박한 자가 이 침묵을 인지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단편은 다만 사이렌의 노래를 이겨 냈다고 알려진 오디세우스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노래 대신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알린다. 화자는 이 “한 줌의 밀랍과 한 다발 사슬”을 가리켜 “미흡한, 아니 유치한 수단도 구제에 쓰일 수 있음의 증거”라고 말했지만,[2] 사이렌의 노래 대신 펼쳐진 사이렌의 침묵이 결과적으로 삶의 여러 방향을 열어 놓은 셈이다.
선율을 벗어난 소리는 특정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 있다. 누군가 입을 떼려는 것인지, 이제 입을 다문 것인지, 말을 아끼려는 것인지, 무슨 말을 더하기 전인지, 이곳이 어떠한 장소인지,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연히 짐작하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듣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순간 변해 가는 소리는 결국 그에 대해 짐작할 필요가 없음을 드러낸다. 각자 다르게 듣는 소리는 더 많은 소리가 된다. 들리는 것들을 듣는 것, 그것이 침묵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가장 적절한 방식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귀를 봉했던 밀랍을 떼고 몸을 묶었던 사슬을 푼다. 그 움직임에서부터 침묵이라는 소리의 과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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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일럽 켈리, 『갤러리 사운드: 미술–소리–공간』, 배혜정·지가은 옮김, 미진사, 2023년, 53면.
[2] 프란츠 카프카, 『집으로 가는 길』, 전영애 옮김, 민음사, 1984년, 195면.